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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Beginners]

허용 2011. 11. 18. 18:40


잔잔하지만 위트가 넘치고 사려 깊은 영화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새로운 삶을 시작해 그를 즐기는 위암 4기의 아버지. (4기 다음에 5기는 없단다.) 서로 사랑했지만 열정은 없었던 부모의 결혼생활을 지켜본 탓에, 언제나 스스로 이별을 자초하는 그의 아들. 영화는 부모의 결혼생활과 아버지가 새 삶을 즐기며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 그리고 현재의 아들이 새로운 여인을 만나 사랑하고 이별하고 재회하는 과정을 재치 있게 교차해서 보여준다. 아들 커플은 고독과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사랑에 투신하는 여느 커플과 달리, 각자의 슬픔과 아픔을 직시하고 그것을 견뎌내는 자력을 지닌 이들이다. 그런 힘을 지녔다고 그들이 물론 슬퍼하지 않고 아파할 줄 모르는 건 아니다. 150개의 단어를 이해하지만 말은 하지 못하는 '아서'와 아픔을 피해 떠돌 수 있는 직업이 있어 견뎌낸다. 그러니 어쩌면 그들은 견디는 힘을 지닌 게 아니라 견디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해야할 것이다. 아서와 같은 친구가 필요하겠구나, 혹은 낭인과 같은 생활을 일부러라도 이어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얼마전 일 때문에 만난 독신의 사진작가(나와 동갑인 남성)는 집안 가구와 집기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대화를 시도하는 것도 외로움을 견디는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영화 속 주인공들도 간혹 그렇게 대화를 한다. 그게 이상하거나 기괴하지 않고 재미있고 유머스럽다. 영화 내내 관객들의 가벼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코메디 영화는 아니다. 조금은 지적인 분위기가 풍기기도 한다. 자신의 행동뿐만 아니라 연인의 모습, 부모님의 삶 모두를 관찰자적인 입장에서, 그리고 그것들과 관련된 당대의 사회적 사건, 혹은 이미지들과 병치시켜 보여주는 방식이 그런 지적인 분위기를 조장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기술 방식이 딱딱하거나 차갑지 않다. 감독은 객관적인 사고방식과 더불어 꽤나 섬세한 내면과 시선을 지닌 사람 같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슬픔의 역사'라는 일러스트 작품은 필경 감독이 실제로 작업했던 것이리라. 실제로 존재한다면 한 번 보고 싶다. 삶과 죽음, 사랑과 슬픔, 시작과 끝 따위의 사색 거리들을 얻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신파 없이 슬픔을 이야기하고 맹목과 환상이 제거된 사랑을 보여주는 영화라서 맘에 든다. 독신들에게는 더 추워지기 전 월동준비 차원에서라도 한 번 볼 만한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