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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치는 이미지들

허용 2011. 9. 29. 15:42

오래전 버스를 타고 가다 큰 트럭에 뿌리채 뽑혀 실려가는 소나무를 보며, 당시 제각각 따로 떨어져 지내게 된 우리 가족들의 모습이 떠올라 울컥했던 적이 있다. 뿌리 뽑혀 실려가는 저 큰 나무는 어디에서 자랐을까, 이제 살던 곳을 떠나 어느 낯선 땅에 심어지게 될까, 그곳에선 또 어떻게 지내게 될까..


일요일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를 보며 그때의 이미지가 퍼득 떠올랐다. 전시는 손봉채의 [이산의 꿈]. 방탄유리의 일종인 폴리카보네이트에 세필로 소나무를 그리고 다섯 겹으로 겹친 뒤 LED로 비춘다. 평면의 화면들이 겹쳐 묘한 입체감-정확히는 원근감-이 든다. 그런데 그려진 소나무들은 대개 마치 구름 위에 떠있는 것처럼 부유하는 이미지들이다. 전시된 그림들 중에 명확하게 땅으로 정의된 바닥이 그려진 예는 많지 않다. 천정에 걸린 그림들은 그런 부유의 이미지를 더욱 직접적으로 강조한다. 하늘에 무리지어 떠 있는 소나무들..



그 이미지는 다시 전시를 보기 전날 밤에 보았던 [천공의 성 라퓨타]의 이미지와 겹쳤다. 영화의 마지막, 라퓨타의 큰 성채는 무너지고 큰 나무 한 그루만이 뿌리를 드러낸 채 하늘을 떠간다. 영화 중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바람과 함께 살아가자. 씨와 함께 겨울을 나고, 새들과 함께 봄을 노래하자." 아무리 발달한 기술을 지녔더라도 대지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게 인간들의 삶이라는 메시지일 수 있겠다. 하야오의 영화들은 대개 그렇다. 매혹적인 마법과 환상적인 기술-특히 비행과 관련된 기술-이 전면에 나서지만 정작 결론은 그런 매혹과 환상보다는 손으로 직접 짠 작은 머리끈-[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나 가난하지만 땅을 일구며 사는 삶-[천공의 성 라퓨타]-이 더 가치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정직한 노동과 현실에 발 딛은 삶을 이야기하는 그라서 그의 영화들이 좋다. 요새는 스튜디오 지브리만 남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없어진 것 같아 조금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