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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척'은 어떻게 오는가

허용 2011. 8. 30. 23:40

의식과 기척에 트랙백

'의식'을 연마한 만큼 '기척'은 자주 나를 찾는다. 의식에 대한 완고한 집착을 연마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의식을 방기해서도 안된다. (손 안에 감추듯 쥐고 있는 돌맹이를 어떻게 연마할 수 있겠으며 손아귀를 떠난 돌을 또한 어찌 연마할 수 있겠는가.) 기척은 원래 '아찔'한 것이어서 의식과 의식을 의식하는 의식-메타 의식-의 아슬한 경계선에 거처하기 때문이다.


감수성은 남들이 무심코, 혹은 일부러 지나치는 그 아슬한 경계선을 기어코 느껴내는 인식의 동력이며, 예민함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기척이 발을 돌려 본래 그가 있던 모호함 속으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소매를 잡아 끄는 감수성의 인력이다. 예민함과 감수성은 그런 식으로 의식과 인척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니 기척이 자주 나를 찾게 하려면 감수성과 예민함으로 의식을 단련시켜야 한다.
 

딜레마는, 예민함과 감수성 없이는 의식과 기척의 간극을 채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예민함과 감수성의 지향성을 내 마음대로 설정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그들은 본성이 본래 그러하여, 사소한 것이나 핵심적인 것을 차별하지 않고 두루 민첩하게 감각한다. 그런 민(敏)/감(感)함을 통제하는 순간-의식이 감각을 통제하는 순간-그들은 숨을 멈춰버린다. 그러니 아무 것에나 아무렇게나 예민하게 감수하도록 가만 나두어야 한다. 그래야 예민함과 감수성은 숨을 이어갈 수 있다.


정작 문제는 그들 예민함과 감수성의 좌우에 포진한 의식과 기척에게 있다. 의식은 기척을 지향하지 않고, 기척은 의식이 지배하는 영역 밖에 있다. 만약 그 둘이 서로를 지향한다면 어찌 될까. 아마도 서로를 파국으로 몰고가는 순정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을 것이다. 의식은 감수성을 찌르고 기척은 예민함을 원망하며 의식이 없는 어두운 강물 속으로 제 몸을 던지는.
 

비극은 둘이 만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만날 수 없는 상황을 아름답게 이야기한다. 독자는 그런 아이러닉한 아름다움에 공명하며 비극을 읽는다. 비극의 아이러닉한 상황을 부정해 극의 뼈대를 바꾸려 한다면 비극은 아름다움의 존재기반 자체를 잃게 된다. 그러니 의식과 기척의 비극적이나 아름다운 거리를 수긍할 수 밖에. 다만 예민함과 감수성은 비극 뿐만 아니라 그 어떠한 극을 감(感)하는 데에도 필수적인 덕목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