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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우지 마라, 고운 잠'

허용 2013. 3. 11. 19:09

來如哀反多羅 3

 

이 순간은 남의 순간이었던가

봄바람은 낡은 베니어판

덜 빠진 못에 걸려 있기도 하고

깊은 숨 들여 마시고 불어도

고운 먼지는 날아가지 않는다

깨우지 마라, 고운 잠

눈 감으면 벌건 살코기와

오돌토돌한 간처녑을 먹고 싶은 날들

깨우지 마라, 고운 잠, 아무래도

나는 남의 순간을 사는 것만 같다

 

-이성복, [래여애반다라] 中

 

 

결코 녹지 않을 것처럼 쌓여있던 눈들이 어느새 사라지고 3월, 개학을 하자 학교는 웅성웅성 생기를 찾고 있다. 이곳의 '봄바람'은 아직 한기가 남은 잔디밭에 앉아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낮술을 마시는 남학생들의 등덜미나, 졸라졸라를 뱉어대며 깔깔대는 어린 여학생들의 입술에 걸려 있는 것 같다. 출근길 이면도로의 눈 녹은 자리엔 쓰레기만 감춰져 있었고 지난 겨울 새로 들어선 건물로 볕 들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볕을 찾아 지난 주말엔 서울 큰 길로 나서 쓰레기를 치우는 심정으로 두 권의 시집을 샀다. 십 년 만에 시집을 낸 이성복의 [래여애반다라]와 '죽어서도 꿈꾸고 싶'다는 노시인 황동규의 [사는 기쁨]. 얼마 전 그녀를 만나 여느 해와 달리 따듯한 겨울을 지낸 나는, 두 시집을 번갈아 읽으며 한기가 남은 응달과 봄볕 비치는 양지 사이를 오가고 있다. 양지 속 나를 보는 응달의 나는 참 염치도 없이 '살코기'와 '간처녑'을 먹는구나 생각하고, 한편으론 설령 '남의 순간을 사는 것'일지라도 이 '고운 잠'이 깨지 않기를 바란다.

 

 

 

 

캠퍼스를 채운 신입생들이며, 봄볕을 받으며 서 있는 나, 그리고 조만간 틔어 오를 투명한 초록색 잎들까지, 모두 '자라지 마라(Never grow old).' 어차피 짧을 생이며 짧을 순간이라! 하지만,

 

삶이여, 네가 기어코

내 원수라면 인사라도 해라,

나는 결코 너에게

해코지하지 않으리라

 

-이성복의 같은 시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