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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목 [실상사에서의 편지]

허용 2013. 1. 20. 17:07

[실상사에서의 편지]

 감기에 종일을 누웠던 일요일 그대에게 가고 싶은 발걸음 돌려 실상사를 찾았습니다 자정의 실상사는 겨울이 먼저 와 나를 기다리고 천 년을 석등으로 선 石工의 살내음 위로 별빛만 속없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상처도 없이 낙엽은 섬돌에 걸려 넘어지고 석탑의 그림자만 희미하게 얼어가는 이 거역 없는 佛心의 뜰 안에 서서 <여기 鐵佛로 支脈을 잡아 새나가는 國運을 막으리라> 정녕 그대를 사랑한 것은 내 생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은빛 시린 서리처럼 오랜 세월 말없이 견디는 계절의 눈빛마다 속 졸이며 현상되는 기억을 대웅전 연꽃무늬 문살에 새기다가 사람의 가슴에도 깊이가 있다면 그대보다 먼 그대의 그리움 또한 아득히 잠기겠지요 실상사 긴 담장을 품고 산허리 꽃 피고 눈 내릴 때마다 더러는 못 참아 술값을 치러가며 떠나온 그 자리 여기 실상사 언제는 그립지 않은 시간이 있었냐며 풍경 소리는 바람의 몸을 더듬고 있었습니다

-신용목『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중

 

산사의 풍경을 노래한 시 중에서 이처럼 고요하면서 알뜰한 시는 처음이다. 겨울, 그것도 한밤의 산사는 '그대에게 가'려 했던 발걸음으로 찾았기에 더욱 고요할 수밖에 없겠지만, 석등, 섬돌, 석탑, 대웅전, 불상, 문살, 담장 등 사찰의 경물들을 하나씩 찾아 딪는 시인의 발걸음은 고요한 속에서 알뜰하기 그지없다. 그 경물들 하나하나에 석공의 살내음과, 상처도 없이 떨어지는 낙엽-그러나 상처 많을 시인-과, 속 졸이는 기억과, 먼 그리움들이 비치고 잠기는 모습들 또한 조곤조곤하기만 하다. 얼어가는 적막 속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풍경과 때댕하며 울리는 그 소리는 자정의 산사가 주는 나즈막한 깨달음의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더러는 못 참아 술값을 치러가며' 산사를 찾은 시인의 마음이 나는 무엇보다 좋다. 우린 너무 잘 참으며 살아가는 건 아닌가 하는 반성마저 인다. 여지껏 산중의 사찰들을 꽤 찾아 가보았지만 이처럼 자정의 고요 속에서 알뜰하게 걸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시를 읽을수록 그 반짝이는 적막을 거닐어 보고 싶은 유혹에, 나 어디가서 술값이라도 치러야 할 것 같다.